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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구호와 아멘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께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잘 지내셨나요? 벗꽃이 내려야 할 봄눈의 계절에 실제 눈이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세상입니다. 매일 매일이 만우절 같은 세상입니다. 핑핑 도는 세상에서 중심을 잘 잡으시길 바라며 생각 나눕니다. 

 

성경번역을 준비했으나 현장의 상황으로 인해 지역사회개발을 해야했던 30대의 저는 그에 대한 경험과 더불어 관련된 서적들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구호 구간'과 '개발 구간'이라는 개념입니다. 구호가 필요한 구간이 있고 개발이 필요한 구간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호가 필요한 상황에 놓인 공동체나 개인이 있고 개발이 필요한 공동체나 개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긴급 재해나 지진 그리고 요즘처럼 산불로 인해 구호 구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하면 무책임하고 죽음으로 모는 셈이 됩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구호가 지나치면 서서히 의존도가 싹트게 되고 이미 개발 구간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립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어려운 문제는 구호 구간과 개발 구간을 무 자르듯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고 그 판단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정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인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그런 인식과 성찰 안에서 그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와 인식이 없으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구호와 시혜에 도취되어 벗어나기가 어렵게 됩니다. 한번 생겨난 의존도는 좀처럼 버리기 어려워 삶의 자세로 굳어지고 한 사회의 패러다임으로 굳어 버리기도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가난한 가정에 소를 주면서도 의존도 방지를 위해 거저 주지 않고 잘 키워서 후에 송아지 한 마리를 이웃 가정을 위해 내놓게 했었다.

 

얼마전 아프리카 출장 중 오랜만에 만난 친구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학교 사역을 하는 그 친구는 소위 '기독교 학교'가 아니라 그냥 자신이 섬기는 그 선교 지역에서 교육을 하기에 그 학교에는 무슬림 아이들도 있고 기독교인 아이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점수의 만점이 500점이라면 무슬림 아이들은 평균 450점 정도를 받고 기독교인 아이들은 평균 100-120 점 정도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다수인 나라에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이 현상은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유럽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백인 아이들보다 이주해 온 무슬림 아이들이 더 열심히 하기에 그 아이들의 실력이 월등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계의 현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친구 선교사가 섬기는 학교에서 무슬림 아이들이 시간을 내어 성적이 뒤쳐진 기독교인 친구들을 도와 주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학업에는 다소 소홀하게 된 무슬림 아이들의 평균이 400점으로 내려가고, 대신 기독교인 아이들의 평균이 300-350 점 정도로 상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겪은 후 무슬림 아이들이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내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알 것 같아요"

 

비단 기독교인 아이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많고 정치, 경제의 리더십에 소위 기독교인이 많다는 그 나라에서 기독교가 지향하는 방향이 어디에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외부로 부터 오는 구호가 많고 그러니 오랜동안 의존도가 굳어졌고 그런 시혜를 받아 신분 상승한 사람들은 번영 신학에 갇혀 있는 듯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를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구호의 틀을 깨는 선교가 아니라 그것을 강화시키는 선교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구호 대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세상을 깊게 만드는 아이들로 성장하기를...

 

 

어느날 어느 교회의 예배당에 앉아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는 소리를 들으며 동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계속되는 구호성, 시혜성 -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리의 말씀이지만 - 멘트에 그렇게 큰 소리로 화답하는 것을 보면서 구호와 개발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며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꼭 필요한 구호 상황, 구호 구간에 있는 공동체와 성도들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공예배에서 계속 그런 식의 메시지가 전달되면 한국교회는 구호 패러다임에 갇힐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려가 현실로 변한 모습을 우리는 오늘도 광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멘' 소리가 큰 곳 일수록 구호 패러다임이 더 견고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저 혼자만의 느낌일까요?

 

구호에서 개발로, 즉 자립으로 전환된 것을 알게 되는 지표 중의 하나는 '아멘' 소리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혹은 '이게 뭐지'라고 더 성찰하게 되는 좋은 후유증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선가 도움을 받으며 웃음 짓는 선교지 아이들의 모습이 언젠가 자신의 공동체와 나라를 위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는 모습으로 변할 날을 기대해 봅니다. 샬롬.

 

2025년 4월 1일

권성찬 드림